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그러니까 서양 날짜로는 1935년 즈음, 두메골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노미라는 어여쁜 소녀가 살고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에 새 잎이 막 돋아 애기 궁둥이 마냥 보들보들하고, 휘엉청 늘어진 그 가지들이 봄바람에 살랑살랑하던 어느 봄날 아침, 열 일곱의 노미는 샘터에 물을 길으러 갔다.
'보소, 지 물 한 바가지 만 주실랍니꺼?'
남자 치고는 꽤 맑은 음성을 가진 목소리에 노미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그만 숨이 턱 막혀버렸다.
'오메~, 무슨 남자가 저리 곱게 생깄노?'
지금껏 어디 가서 인물 못하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는 노미였지만 이 남자 앞에서는 그만 정신이 혼미하고 입이 굳어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랬다. 체구가 큰 사람은 아니었지만 키는 훤칠하고, 살결은 여느 여인보다 더 맑고 뽀얀데, 깊고 큰 눈동자와 선이 굵은 눈섭은 또 여느 사내보다 굳세보였다. 오똑한 콧날은 깎아놓은 듯 하고, 그 아래 굳게 닫은 입술은 터질듯 붉고 도톰했다. 세상 내로라 하는 그 어떤 미모의 여인이 와도 이 남자 앞에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을 것 같았다. 한마디로 그 는 참말로 잘생긴 남자였다. 그렇게 노미는 진화를 만났다. 1937년 이른 봄의 어느 날,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떤 폭풍 같은 시간을 함께 하게 될지 그때는 몰랐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며 살았지만 수없이 많은 소중한 것들을 속절 없이 잃어야 했던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 따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폭풍이 몰아쳐도 우리는 견뎌야 했고, 우리는 그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소중것들을 잃었고, 잊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살았더니 이제는 그 시절 그 일들이 정말 없던 일이 되어 버렸나 보다. 누군가는 그런 일은 정말로 없었다고 우기고, 누군가는 정말로 그런 일은 없다고 믿었다. 실은 그저 먹고 사느라 바빠서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누구를 잊었는지 이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먹고 사~느라 바빠서 말이다.
'아무도 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해야할 이야기'이기에 해보려 한다. 그 시절 노미와 진화, 윤화, 남화, 석이, 태화, 민화, 정화, 미순이, 나영이, 가희, 참으로 꽃보다 고왔던, 별보다 빛났던 그 떄의 소년들과 소녀들의 이야기를 이제 들려주고 싶다.